강태환 선생님의 연주를 들으러 갔다.
백남준 미술관, 6월 말이었다.
매달 하는 연주회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한 학기 수업도 들은 바 있는 김현준 교수가 말했다.
"추상을 구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왜곡을 불러온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었으나, 책에만 있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그런 말을 안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책에서만 가능한 말을 정확히 하는 사람을 두 번째로 지지한다는 건 
그걸로 납득시킬 수 없다.
사람도 의견도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뻔뻔해질만큼 담대하진 못하다.
 
연주 뒤에는 케이터링이 있었다.
맥주도 안 주면서, 나초와 살사소스를 가득 놓은 테이블.
주최측은 비둘기가 왜 그 지경이 됐나 생각해봐야 한다.
이제 피자 다 먹었으니, 비둘기의 세상이 되어도 좋다는 거냐. 
나보다 상시공복인 위장이 더 심통이 났다.
전적으로 그 사람들 탓은 아니었다.
삼원색 핸드폰줄 산다고 회장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더 좋은 거 사보겠다고 두리번거린 탓이다.
그래봤자 노래는 추자고, 반하는 건 첫 눈이었지만.

두 개 사서 그녀에게 하나 줬다.
머리 속으로 잠깐 정전이 있었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행동이 좀 더 아름다워질텐데.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에 걸었다. 괜히.
그녀가 나를 따라하지 않은 건 현명하다는 뜻이었다.
이상하게도 반갑다기보단 당연하단 쪽의 생각이었다.

데이트도 하고, 친구도 만나면서 2주를 쉬었다.
일이 쌓여가는 걸 체감하면서 하나도 안(못)했다.
여행 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후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어야겠다.
하지만 친근한 사람과의 대화는 결국 나에 대한 화살이 되어서, 
여행지 못지 않게 안하던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좀 피곤했던 걸까.
내가 워커홀릭일리도 없으니까 말이지.
친구와 여자에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더 어렵고 귀찮아지고 있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줄었을 뿐인데, 규칙은 훨씬 더 혹독하다.
내일부터 GQ 사무실에 간다.
Posted by 방영남

소철의 여름

underground 2009/06/28 16:45

잎이 튼튼해서 좋다고 나는 말했다.
물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주면 됐다.
가끔 옥상에 올려놓고 햇빛을 쬐게 했다.
새싹은 한 번 났는데, 잠시 맡아 기르던 강아지가 물어 뜯었다.
새싹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이었다.
나는 겨울에 대해 생각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는 알아서 잘 버텼다.
여름이 오자 무관심은 자의식으로 바뀌었다.
맹렬한 이 세상의 생명들에 경탄하는 동안 부끄러운 느낌이 든 건 하나의 암시였다. 
잎이 누렇게 타버린걸 보았다. 
한 달 정도 물을 주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 잎들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그제서야 그에게 쏟아부을 수 있는 물기가 생겨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눈물은 늦게 도착했다.
그나마 덜 탄 잎들은 뜯어내지 않았다.
원망하듯이 매일같이 잎이 떨어졌다.
지금은 여름이었다.
흙을 갈아주고 흙의 상태를 살피며 물을 주었다.
잎이 강하다는 사실도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줘야 한다는 상식도 필요 없었다.
인간은 왜 정성을 수치화, 가시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했다.
새싹이 세 줄기 돋아났다.
금세 오래된 줄기만큼 커졌다.
가시도 없고 연약했다 하지만 부드러웠다.
다른 눈물이 도착했다.
눈물을 닦아냈다.
시간의 도약이 일어났다.
튼튼한 잎들의 흐릿했던 과거가 분명해졌다.
시간이 겹쳐졌다.
그녀에게도 오래된 강함과 오래된 약함이 있었다.
나는 강함을 찬양하느라 약함을 보지 못했다.
내 찬양이 순수한 거라는 믿음은 그보다 먼저 있었다.
여름이 점점 더 좋다.
나는 순수하지 않다.
부끄러운 건 안다.
비록 여름이지만.

Posted by 방영남

그가 마을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바로 우리 시대였다. 누구도 그처럼 치열하게 자기를 시대 속에 던져 시대와 하나 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숭고, 그가 넘지 못한 한계 그리고 비극적 종말이 모두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숭고였으며, 우리 자신의 한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의 이 비극적인 종말은 시대가 길을 잃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한 것이 아닌가?

1979년 부마항쟁으로 장전되고, 80년 광주항쟁을 통해 발사된 시대, 모든 불의한 것들에 대한 광기 어린 분노가 총알처럼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던 시대가 불러낸 사나이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는 광주항쟁 이듬해 이른바 부림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부산의 대학생들을 변호사로서 만나면서 처음 역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순수한 공감이 아무 걱정 없던 세무 전문 변호사를 역사의 가시밭길로 불러내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역사의 부름에 언제나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치열하게 응답했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치열함이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이 그를 끝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밀어올렸다. 그것은 그의 명예이기 이전에 한 시대가 보여줄 수 있는 치솟은 숭고였으니, 그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나는 역사가 이렇게 한 걸음 더 진보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5년 뒤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짐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청와대를 떠날 때, 내겐 더 이상 그에게 실망하고 분노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고향마을에 큰 집을 지어 이사하는 것을 보고, 잠깐 그 많은 공사비가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을 뿐.

그런데 그가 고향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왜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워지는가. 그는 자기를 던졌는데 나는 왜 구차하게 살아 있는가? 그의 시대는 나의 시대이기도 했으며, 그의 실패는 나의 실패이기도 했는데, 왜 그만 가고, 나는 여기 남아 있는가.

내가 그에게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는 치열했다. 이를테면 그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그가 곧 한 시대였으니 시대의 좌절이 그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돌아온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라, 한때 우리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가 다른 것도 아니고 광주를 팔아 노벨상을 구걸하고 있을 때, 노무현은 모욕과 멸시 속에서 구차하고 더럽게 살기보다 깨끗이 파멸을 선택함으로써, 우리 시대가 비록 실패한 시대이기는 했으나, 적어도 비겁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우리 시대가 오월 광주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듯이, 모든 새로운 시대는 죽음 위에서 잉태된다.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으니 머지않아 운명의 여신은 그 핏값을 받기 위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이 그에게 적용했던 그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그 심판을 피하려면 우리 자신이 정화되어야 할 것이니, 역사는 그렇게 쇄신되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Posted by 방영남